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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소설가 구보씨의 1일 - 박태원 | by Hoon

by 플로거 2011. 1. 7.



2010년 12월 12일 오늘은 드디어 최근 스크랩한 문화공연들중에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한편의 연극을 보았다.

그것이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1일' 이다.


박태원 [朴泰遠, 1910.1.17(음력 1909.12.7)~1986.7.10] 

한국의 소설가. 1933년 구인회에 가담한 이후 반계몽, 반계급주의문학의 입장에 서서 세태풍속을 착실하게 묘사한 《소설가 구보씨의 1일》, 《천변풍경》 등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구보, 박태원은 1930년대,  암울과 치욕의 식민지 시대에, 서울토박이였다.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일본 호세이대학교 - 예과를 중퇴한

시인 겸 소설가 이상을 친구로 둔 수재였다.


월급쟁이나 직장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어머니의 걱정을 끼치는 스물여섯,

당시에는 혼기가 찬 아들이었다.

그는 아침이와도 늦게까지 잠을 자다가 늦으막히 오후에나 매일같이 길을 나선다.

전차를 타고, 커피숖, 다방, 식당, 술집을 혹은 혼자, 혹은 그의 벗들과 전전하며,

집은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간다.

암울함과 우울이 가득할 것 같은 식민지 시대의 서울의 종로일대를 돌아다니는 그의 눈에 비친 모습은 우울하지만은 않다.

싱겁기 그지없고, 명량하기까지한 그의 눈은 있는 그대로의 감상으로 1930년대 서울을 투영한다.

(일제강점 이후 명동이 일본인 중심의 상가로 변한 반면, 종로는 여전히 조선의 거리였다.)


작품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우리에게는 부정하고 싶은 치욕의 역사가 있을 뿐 근대, 모던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기에서도 우리의 젊은 이들은 이 땅에 살아있었고,

우울과 암울함이 심장을 채우고 있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어머니의 걱정과 사랑덕에 계속해서 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놓고 삶을 살아내어 왔다.


그리고,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모두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하고,

모두가 죽음을 택했다면,

이 땅에 우리의 역사는 그렇게 완전히 끊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한 우리와 이 땅을 지켜온 것은 바로 우리네들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오늘도 이땅의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걱정과 사랑은 여전하다.

뉴스에서 보는, 대학 입시설명회를 자식과 같이 가서 나란히 듣고있는 부모들.

그들의 눈과 얼굴에는 그러함이 가득하다.

지금의 현실은 1930년대와는 다른 우울이 이땅에 존재한다.

유치원을 가기 이전 부터 시작되는 끊임없는 경쟁과, 바늘구멍같은 취업,

보장되지 않는 직업과 정년.

그러나, 이제 우울해 하지말자, 80년전 치욕의 시대속에서 울분과 우울을 품고 살아야 했던

그때의 젊은이들에 비해, 작금은 너무도 행복하지 않은가?

구보(박태원)가 2010년 오늘의 서울을 다시 걷는다면 어떤 생각과 어떤 이야기를 할까?

근대를 살았던, 이땅의 구보들은 대부분 어느 덧 그 생을 마감했다.

그들은 암울함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광복이란 기쁨을 맛봤고,

무엇보다 소중한, 이 땅의 기초를 다지며, 그것을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그 위에 오늘의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있다.

우리는 구보와 같이 오늘의 종로를 걸으며, 생각해보자.

1930년대와 현재의 이땅을,

우리의 젊은이들을,

그리고 그들을 지켜온 우리의 어머니들을


- 작 : Hoon

- 2010 년 12월 12월 종로에서  [연극]'소설가 구보씨의 1일'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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